박준철 회장의 21번째 개성가는 길 2

예정된 시간에 따라 주차장에 집결하여 개성시 한옥마을인 민속여관으로 중식을 하기 위해 11시 40분 이곳 폭포에서 오던 길로 출발하였다.

                      ▲ 한옥마을     앞에서
▲ 한옥마을 앞에서
우리가 돌아서 다시 오는 이 통일로는 1992년 김일성 주석 80회 생일을 위해 5년간에 걸쳐 중장비도 없이 지역주민과 군대가 동원되어, 피땀어린 노동력으로 만들어진 도로다. 5년만에 완공된 개성과 평양간 6차선 도로는 170km. 물동량이 그리 많지 않아서인지 비교적 손상된 흔적이 적고 도로의 중간 분리대나 길가의 가로수는 거의 없었다. 어쩌다 심은 나무는 영양실조로 찌든 것처럼 작아 보여 애처로울 정도였다.

고려 500년 역사를 지닌 도읍지 개성직할시에 입성해 자남산 왼편에 한옥으로 지어진 ‘민속여관’에 도착한 시간은 12시 20분. 우리 일행은 연회장이 있는 민속여관에서 150명, 다른 일행 150명은 민속요리 전문점 ‘통일관’에서 식사를 했다.

                      ▲ 13첩     반상기
▲ 13첩 반상기
일행의 식사메뉴는 개성정식이었는데 방짜유기(놋그릇)에 13첩 반상기(반찬)가 담기고 밥과 국은 별도로 나왔다. 옛 임금이 13첩 반상기로 식사를 했다던데 우리 서민이 13첩 반상기로 중식을 했다면 아주 큰 식사가 아니겠는가?

                      ▲ 13첩 반상기로 차려진       점심식사
▲ 13첩 반상기로 차려진 점심식사
점심식사 후 우리 일행은 다음 목적지인 포은 정몽주 생가에 갔다. 정모주의 생가인 숭양서원은 개성문화회관 뒤편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 곳은 고려 말 충신 정몽주를 모신 사당으로 멀지 않은 곳에 선죽교와 표충비가 있었다.

                      ▲ 정몽주 생가인 '숭양서원'       앞에서 북측 안내원이 설명을 하고 있다.
▲ 정몽주 생가인 '숭양서원' 앞에서 북측 안내원이 설명을 하고 있다.
서원에 들어서니 수려한 정원수와 고목들(고풍의 소나무, 목련, 대나무, 잣나무)이 오랜 세월을 말해주듯 푸르름으로 관광객을 맞이했다.

                      ▲ 숭양서원 정몽주와 서경덕의       위패
▲ 숭양서원 정몽주와 서경덕의 위패
                      ▲ 정몽주     초상화
▲ 정몽주 초상화
안내원을 통하여 수양서원에 대한 역사와 내력을 듣고, 정원을 살핀 후 계단에 올라 첫 뜨락에 서니 그곳에는 3채의 사당이 있었고, 또 한 계단을 오르니 단독으로 지어진 사당이 보였는데 윗편 방에는 위패를 모셨고, 그 옆방에는 포은 선생의 영정을 모셔 놓았다. 뜨락 건물 좌우에는 ‘숭양서원절’이라는 실명비가 양쪽으로 세워져 있었는데 수령을 알 수 없는 오랜 향나무가 또한 일품이었다.

                      ▲ 숭양서원내     고목
▲ 숭양서원내 고목
안내원에 의하면 송악산은 ‘어머니의 산’이라고도 하며, 대표적인 산으로 숭상하는 산이라 하여 ‘숭산’이라고도 불린다. ‘숭양’은 송악산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어 ‘서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차량으로 이동하여 개성 선죽동에 있는 ‘선죽교와 표충비’가 있는 곳에 서니 정원은 그리 고풍스럽지는 않으나 비교적 아담하고, 다리 옆 한가운데로 작은 개천이 흘렀다.

                      ▲ 선죽교의     모습
▲ 선죽교의 모습
                      ▲ 선죽교에서       기념촬영
▲ 선죽교에서 기념촬영
개성의 선죽교는 고려 태조가 919년 개성시 소도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며 1392년 정몽주가 조선 태종 이방원의 일당인 조영규에 의해 쇠뭉치로 살해된 다리로 유명하다. 고려 초기에 놓였던 선죽교는 원래 ‘선지로’였으며, 포은 선생이 피살된 후 그 자리에 참대나무가 자랐다 하여 ‘선죽교’로 개칭됐다.

선죽교(8.35m*3.36m)는 국보급 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비교적 관리가 잘 되어 있다. 1780년 후손들이 다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돌난간을 둘러막고 옆으로 돌판을 별도로 놓아 사람들이 건너게 했다고 한다. 다리를 건너가면 선명하게 ‘善竹橋(선죽교)’라고 쓴 돌비석을 볼 수 있는데 이 글 또한 ‘한석봉’이 쓴 글이라고 안내원은 설명해주었다.

                              ▲       표충비                                                                                                ▲ 예로부터 자식을             낳게 하는 효험이 있다해 유명한 거북 위의 표충비
▲ 표충비 ▲ 예로부터 자식을 낳게 하는 효험이 있다해 유명한 거북 위의 표충비
비각 담장 너머 은행나무를 옆으로 하고 ‘표충각’ 앞에 서니 안에는 두 마리의 거북이등에 비석이 있는데 이는 고려왕조의 절개를 지킨 정몽주의 충의(忠義)를 표창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 비석을 보니 온 몸에 전율이 일며, 정몽주의 절개와 충성심을 들려주는 ‘단심가'가 떠올랐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의 기개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서릿발 같은 경구처럼 들리는 듯 했다. 그러나 옆에 기록된 현판에는 개성시 인민위원회가 표충비를 설명하면서 충신 정몽주와 같이 인민들이 현 체제에 충성토록 하기 위한 설명문이 곁들여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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