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씨년스러운 겨울의 끝자락, 광명고등학교 로비로 들어가면 변성기를 완전히 거치지 않은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온다. 장난을 치는 듯한 소란스러움과 왠지 모르게 들떠 있는 듯한 기류를 따라 가면 1층 오른쪽 구석에서 교사연수실을 발견할 수 있다. 문을 여니, 캄캄했던 교사 복도로 어두운 무대에 비추는 스포트라이트처럼 밝은 조명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무언가에 흥취되어 있던 학생들은 낯선 침입자를 잠시 멍하게 응시한다.

연극 무대 한가운데로 뛰어들었음을 깨달은 기자는 잠시 머쓱해져 배우들과 스탭들을 훑어보았다. 광명고등학교 연극동아리 HERO(히어로). 이들은 2월 25일 광명문화원 대강당에서의 공연을 준비 중이었다.

이들이 공연하는 작품은 ‘열개의 인디안 인형’. 아가사크리스티 작품을 각색한 것이다. 겨울방학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9시까지 강행군이다. 아직 무대에 익숙지 않은 몸짓에도 불구하고 지겨운 반복 연습마저도 이들에게는 하나의 퍼포먼스처럼 느껴졌다.

열개의 인디안 인형
HERO가 오는 25일 무대에 올리는 작품은 최고의 베스트셀러 추리작가였던 아가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연극대본으로 각색한 ‘열 개의 인디안 인형’이다. 이 작품은 어느 섬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모든 통신수단이나 탈출로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하나씩 이유없이 살해되는 내용을 담은 것이다. 이 작품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 중에서도 서스펜스와 흡인력으로 인정받고 있는 소설이고, 오래전에 이미 영화화되었으며, 만화책 ‘소년탐정 김전일’에도 차용된 적이 있다.

“다른 인간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분명 나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이죠. 연기란 하나의 캐릭터를 형성시키는 과정을 통해 다른 세계를 배워가는 과정입니다.” 올해 2학년으로 진학하는 이경수군은 두 번의 경험을 통해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연기하는 인물은 부족함 없이 자라 거만한데다가 여자까지 밝히는 안토니 마스튼. 그는 자신이 유별난 캐릭터인 안토니와 닮았음을 생각해보며 자신의 인간관계를 고민한다.

HERO의 배우들은 아직 연극적인 움직임과 대사를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기성연극의 스테레오 타입화된 몸짓과는 확실히 차이점이 있었다. 계속된 연습을 통해 새로운 제안이 오갔고 순간적인 임기응변에 강한 세대답게 애드립이 난무했다.

HERO의 연습 분위기는 유쾌함을 잃지 않는다. 로저스 부인역을 맡은 김준영양은 연습이 즐겁게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조혜련’이다.

연기진과 마찬가지로 스탭진 역시 생각이 남다르다. 음향감독과 스탭지휘를 맡고 있는 윤하얀양은 무대 안과 밖의 세계의 이질성을 인식함과 동시에 타인과의 쉼없는 갈등을 통해 많은 것을 얻었다고 말한다. 종합예술로서의 연극이 가지는 넓은 포용력 덕분에 인간에 대해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심리학자가 되고 싶다.

HERO의 단원들이 연극부 활동을 통해 얻은 것으로 가장 먼저 손꼽는 것은 친밀한 인간관계와 소중한 인연이다. “입단 처음에는 발성연습으로 귀찮아 하지만 몇 개월 지나면 끈끈한 유대관계가 형성되어 있어요.” 학교에서 활동하는 15개 내외의 동아리 중 친목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오태식군.

6기 단장을 맡고 있는 그는 갑작스러운 이사로 많은 시간을 단원들과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해하지만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이제 3학년에 진학해 HERO 활동을 그만두어야만 하는 것이다. 3학년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동아리 활동을 중단하는 것이 관례화된 듯 했다. 마찬가지로 이번 공연을 끝으로 활동을 그만두어야 하는 정상협군 역시 후회없이 마무리 짓고 싶다.

25일 공연이 끝나면 책상 앞으로 복귀해야 하는 이들에게 우리가 던져야하는 것은 단지 갈채 뿐이 아니라는 생각도 잠시, 어느 새 연습이 재개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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