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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성혜 칼럼] 광명시민은 왜 평생 모은 것을 서울에 기증했나?제2편> 광명을 아카이브 하라!
  • 민성혜 본지 편집위원 / 광명역사문화연구소장
  • 승인 2021.08.02 21:25
  • 댓글 3
*** 민성혜 광명지역신문 편집위원은 광명문화원 광명역사문화연구소장, 경기도문화원연합회 경기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사)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 객원연구원, 광명교육지원청 사회과 교재 연구위원 및 교재 감수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 민간기록협의회 민간기록위원 등을 역임했다.

광명지역신문=민성혜 본지 편집위원> 10여 년 전, 광명시에서 발행하는 '광명소식'에서, 광명시에 살면서 다양한 수집을 해온 시민이 평생의 수집품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광명시민이 광명에서 수집한 수집품을 광명시가 아닌 서울특별시에 기증한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했다.

광명시의 3대 역사 인물로 알려진 경산 정원용(1783~1873)은 광명시 학온동에 속하는 노온사동의 사들에 살았다. 정원용은 강화에 살던 덕완군을 왕으로 옹립하였고, 순조, 헌종, 철종, 고종 등 4대 왕에 걸쳐 여섯 차례 영의정이었다. 노온사동의 어르신들이 젊어서 정원용 대감의 집인 ‘99칸 기와집’에 일을 도우러 갔던 기억을 전해주기도 했고, 온신초등학교 뒤쪽 공동묘지에 있던 상여로 장례를 치르기도 했다고 전해주셨다. 물론 현재 상여집에 남아있는 상여는 그 상여가 아니지만 정원용과 관련된 기억이 노온사동 일대에 크게 자리잡아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사들 마을에 제2경인고속도로 진출로가 생기고, 지하차도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사들에서도 군웅제를 지냈었다고 한다. 군웅은 마을의 수호신인데, 사들 마을 사람들은 정원용의 관복을 군웅으로 모시고 마을제를 지냈다고 한다. 정원용의 관복은 1968년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되어 중요민속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되었다.

정원용 묘 (향토유적 제2호) - 정원용 선생은 순조2년 정시문과 을과로 급제한후, 가주서.검열.부응교등을 거쳐 이조참의 대사간.관서위유사.강원도 관찰사등의 벼슬을 역임 하였다. 순조 31년 예조.이조판서를 거쳐 헌종3년 우의정.좌의정.판중추부사가 되었으며, 헌종이 승하하자 철종을 옹립하여 즉위케 하였다. 1863년 철종이 승하하자 원상이 되어 고종이 즉위할때까지 국정을 관장했고 이듬해에는 실록청 총재관으로 철종 실록의 편찬을 주관 하였다. 그는 고종 10년 91세를 일기로 타계하고 노온사동에 위치한 정경부인 강릉김씨와 합장되었다. 묘앞에는 묘비와 상석.향로석이 좌.우에는 망주석이 갖추어져 있다. (자료제공=광명시)

광명시에서 도시화가 진행되지 않은 학온동의 경우 개발과 함께 선사 및 역사 유적과 유물이 발굴될 가능성이 크다. 실례로 광명-수원 간 고속도로 건설 중 청동기 유적의 흔적이 드러나 연구, 조사되기도 했고, 가학동 도로를 확장시 문화류씨 류성구의 합장묘를 이장하면서 훼손되지 않은 의류 등 부장품이 나오기도 했다. 의류 등 부장품은 경기도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유럽의 유명 박물관의 대표적 유물들은 유럽의 것이 아니라, 과거 식민지나 침략한 국가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유물들로 인해 박물관을 소유하고 있는 국가는 문화강국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 상식에 가깝다. 더하여 수많은 관광객이 박물관을 찾아오면서 관광으로 인한 수익, 국가 이미지 호감도 상승과 같이 무형의 자산을 얻는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중요 유물과 기록 전시를 통해 얻는 가치에 대한 이해와 활용은 우리나라의 광역시도 차원에서 지자체로까지 확대되어, 각 지자체는 역사관 또는 기록관을 설립해 지역의 역사 인물과 관련한 유물, 지역민들의 삶이 담긴 근현대생활문화자료 그리고 행정기록물까지 전시해 급변하는 지자체의 최근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홍성군을 예로들면, 홍성군을 상징하는 장소이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홍주성과 홍성군청에 가까운 장소에 역사관을 마련하여, 군민들이 홍주성에서 진행되는 행사를 역사관 옥상에서 구경할 정도로 친근하고 개방된 장소로 만들어냈다.

증평기록관은 증평군의 행정기록물을 관리하는 기관에서 기능을 확대하여, 증평군의 탄생을 주도한 군민들의 역사를 전시함으로써 군민들의 자긍심을 북돋고, 증평기록관을 중심으로 소통하는 공간, 기억하는 공간, 증평아카이브를 만들어냈다.

두 지자체의 사례를 보면, 아카이브와 전시는 조선시대 이전의 역사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현재를 살고있는 시민과 시민의 역사를 모으고, 기록하고, 시민들에게 다시 돌려주는 활동으로 개념과 영역이 확대되고 있다.

광명시 개청 40주년 기념 특별전시, "시민의 기억, 광명의 역사" (사진=광명시)

다시 광명시의 사례로 돌아가 보자. 평생 모은 생활사 기록들, 한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군웅의 신체로 모셔지던 관복, 광명의 땅에서 출토된 귀한 복식들이 왜 광명시에서 보존되고 관리되지 못하고, 서울과 경기도의 박물관으로 기증되었을까.

긴급히 발굴될 유물을 온전히 보존할 시설이 없기 때문이다. 광명의 남부 지역은 이미 청동기 유적을 보유하고 있으며, 가학동 곳곳에 지석묘(고인돌)들이 흙 속에 묻혀있다. 덤불 속에, 농토 속에, 마을 속 어딘가에 묻혀있던 옛 유적들은 토지개발과 함께 드러나게 될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유물을 수습해도 적절히 보존할 수장고와 전시공간이 없다면 훌륭한 시설을 갖춘 타 지역의 박물관으로 보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광명의 전시관에 있다면 광명 지역의 누구 집에서 보유한 어떤 용도의 것이라는 증명이 가능하며, 광명시민의 역사문화자산으로 제공될 수 있지만, 타 지역으로 보내지면 서울과 경기도가 보유한 수많은 관복과 의류, 청동기 유물 중 하나일 뿐이다.

시민들은 평생 모은 애정어린 소장품, 선대부터 대대로 사용하던 귀한 유물을 고물로 팔고, 폐기물로 처리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잘 이해하고 관리해 줄 곳을 찾기 마련이다. 이렇게 명예롭게 관리해 줄 기관을 찾게 되는데, 그것이 우리 지역에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마땅한 곳이 없기 때문에 서울시로, 경기도로 기증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를 떠나간 역사문화자산은 다시 되찾기 어렵다.

광명시와 광명문화원은 광명시의 자연마을, 앞으로 몇 년이 지나면 첨단연구단지와 물류센터, 주택지로 변화하여 사라질 곳에서 구술 인터뷰를 하고 근현대생활문화자료를 모으고 있다. 마을의 모습은 사진으로, 영상으로 기록하고 있다. 기록화는 3D 실감 영상 등으로 확대해 나가야 한다. 

광명문화원은 지역 조사 및 연구를 기반으로 광명학 교육프로그램을 마련해 학생과 시민을 대상으로 지역학과 아카이브 교육을 진행해 왔고, 구술 인터뷰를 통해 확인된 생활문화자료를 수집하여 협소하지만, 작게 전시해 두었다. 광명시교육지원청은 광명문화원에서 연구된 자료를 활용하여 광명 지역의 학생 대상으로 지역학 교육을 위한 사업을 확대해 가고 있다. 

이 모든 연구 역량을 모으고 수집된 역사문화 및 생활문화 자료를 담기 위한 전시와 연구공간이 마련되어야 한다. 광명 지역의 역사문화를 아카이브하고 전시하는 일은 미래를 위한 문화자산형성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광명지역신문, JOYGM

민성혜 본지 편집위원 / 광명역사문화연구소장  webmaster@joyg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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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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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물안 개구리 2021-08-05 07:36:04

    뻑~하면 자~칭 대학 교수라고 하는 분들..
    광명시에는 문화재 위원 1명도 없습니까?

    자칭 문화재위원말고
    문화재청 에 위촉된 대학교 ..대학원 전임교수말이요..

    하기야
    경주. 전주 .부여 .한성 옛도읍지 이라야
    연구한것이 있어야 선비들이 모이지...   삭제

    • 부끄러워 해라 2021-08-03 21:28:16

      역사의 가치를 모르는 자들
      광명은 대체 왜 모든게 부족한가요?   삭제

      • 노랑색 2021-08-03 13:22:28

        싹수 가 노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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