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내가 왜 그랬을까?’ 되풀이 해서 물어도 ‘그 때는 그랬다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결론은 한가지다. 이유는 후회가 아니라 못 잊는다는 데 있다. 잊기가 아까워서 못 잊는 것이다.
나만 아는 비밀을 간직한 물건은 차마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나이를 먹어도 귀찮거나 희미하게 느껴지지 않은 감정은 첫사랑의 주술일까? 솜털의 떨림 같고 운명의 떨림 같기도 한,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 그래서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것.

가보지 않은 그 남자의 부음을 들은 지 얼마 안 되고 집들이차 방문한 후배의 집 근처에서 그 남자네 집을 찾는다. 그 남자의 중년도 노년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으면서.
오직 나에게 그가 영원히 아름다운 청년인 것처럼 그에게 나도 영원히 구슬 같은 처녀일거란 믿음만으로도 충분하면서.
‘현보’..그 남자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 그가 떠나 없어도 자신의 몸 어딘가에 숨어있는 살아있는 기운 같은 게 입 안 가득 고이는 것 같은 느낌으로 남아있으므로..

누군가로부터 첫사랑의 사람이 나였다고, 그 상처가 너무 아파 눈물을 흘리더라는 얘기를 듣는다면. 그리고 만나고 싶어한다면 아니면 만나서 위로를 해줄 것을 부탁받는다면? 그 사람을 만나기로 한 날을 기다리는 시간..이 세상 어딘가에서 한 사람이 나 때문에 앓고 있다는 확신이 일상의 무의미를 뚫고 힘을 발할지 모르겠다.
무엇을 입고 나갈까? 이옷 저옷 다 꺼내 거울 앞에서 입어 보기도 하고 무수히 많은 말들 중 가장 근사한 첫마디를 골라 연습하기도 하지 않을까.

첫사랑의 사람은 만나지 않는게 낫다고들 한다. 궁금함의 유혹을 물리치게 하는 건 어쩌면 서로 주고 받을 실망으로 첫사랑의 추억이 동강 날 것이 두려워서가 아닐런지. 우리가 꿈꾸는 첫마디는 ‘하나도 안 변했다’. ‘옛날 그대로네’ ‘조금도 늙지 않았다’ 가 아닐까.

하지만 인생의 쓰고 단 경험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드러낼 수 있을 때 그리고 나의 그 남자에게서도 그것을 정직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나도 첫사랑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변한 모습은 그것대로 변하지 않은 건 또 그것대로.

‘그 남자’를 읽어 가는 동안 고등학교 시절 음악시간에 불렀던 ‘그 집앞’이 흥얼거려졌다. 우리 현재 삶의 반 이상은 추억의 무게일 것이다. 아무것도 안 그리워하면 무슨 재미로 살겠는가?

노민화 ㅣ 광명동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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