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 인터뷰] 제20호 무형문화재 '임웅수 선생'
임웅수 선생은 광명시의 대표적인 농악인이다. 그는 경기도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통해 무형문화재 <광명농악> 보유자로 지난 3월 6일 확정 고시됐다.
임웅수 선생의 무형문화재 지정은 개인의 영광을 넘어 광명시의 경사다. 한국방송예술진흥원 겸임교수, 국악협회 한국농악분과위원장, 광명시립농악단 예술감독, 한국예총 광명시지회장, 한국국악협회 이사, 전국대사습보존회 이사 등 농악분야에서 그의 존재감은 가히 독보적이다.
농악을 배우는 것은 외롭고 힘든 자신과의 싸움
어릴 적부터 농악을 좋아했던 그는 공주농업고등학교 농악반에 3년 장학생으로 입학했고, 충청도 농악의 대부인 김태산 선생을 만나 사사받았으며, 한국민속촌 정인삼 선생을 만나 정제되지 않았던 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울 기회를 얻었다. 농사지어 근근히 먹고살던 시절, 대부분이 그렇듯이 농악을 배우는데 부모님의 뒷바라지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당시 그는 혼자 길을 헤쳐나가는 것이 외롭고 힘든 자신과의 싸움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는 어린 나이에 스스로 대가들을 찾아다니며 어깨너머로 농악을 배웠다.
임웅수 선생이 광명에 터를 잡은 것은 1991년부터다. “한번 맥이 끊어지면 10년, 20년, 아니면 수세대에 걸쳐 대가 끊어질 수도 있습니다.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통해 우리 것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해요.”
광명농악은 그의 이런 철학을 바탕으로 발굴, 복원되었다. 광명농악은 450년전부터 소하리, 철산리 등지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났고, 계속 이어져 내려오다가 300년 맥이 끊겼다. 이후 1900년대 성행하다가 6.25 전쟁을 기점으로 또 다시 사라졌다. 1978년 광명에 들어온 故유인필 선생이 광명농악을 복원하기 시작한 것은 소하리, 철산리 노인들이 노인정에서 “심심한데 옛날 생각해서 한번 춰 보자”고 한 것이 계기가 됐고, 91년 임웅수는 유인필 선생, 구인서 선생 등을 비롯해 광명농악을 기억하는 어르신들의 증언을 토대로 해서, 서도소리 중요무형문화재인 이춘목 선생과 함께 광명농악 복원사업을 완성했다.
이렇게 복원된 광명농악은 그의 열정과 지역사회의 노력으로 94년 경기도 민속예술경연대회 대상, 95년 제3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국무총리상을 수상했고, 97년 경기도에서 광명농악을 문화재로 지정하면서 이후 광명농악보존회 결성, 광명농악 전승학교로 충현고 지정, 광명농악축제 개최 등 광명을 전국에 알리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했다.
광명농악의 성공적인 복원은 사라져가는 우리 전통문화의 보존과 계승에 대해 지역사회에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게 했고, 우리 것을 저변에 확대해야 한다는 명분을 만들었다. 그는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아방리줄다리기, 아방리농요, 소하리당굿, 쇠머리 디딜방아 액막이놀이 등 사라졌던 광명의 전통을 발굴해 현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으며, 충현고, 광명농악보존회, 동 주민센터 등에서 후진 양성과 광명농악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광명은 농악의 메카 .. 광명농악전수회관 건립해야
임웅수 선생의 바람은 농악전수회관을 건립해 광명농악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광명농악이 대한민국의 대표 농악이 되고, 대한민국을 전세계에 알리는 아이콘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한다.
“지금은 외부에서 광명농악을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있는 장소가 없습니다. 광명의 농악인들이 연습할 장소 역시 열악한 실정이니까요. 전수회관을 건립해 필봉농악과 같이 전국 대학생들이 방학이나 주말이면 배우러 찾아오는 농악의 메카로 광명이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더 많은 지역사회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2012년은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준비하는 해다. 그는 요즘 광명농악으로 지구촌 어려운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줄 수 있는 공연을 계획하고 있으며, 아프리카 민속인들을 초청해 광명농악과의 협연도 추진할 계획이다. 광명농악을 다른 세계의 전통문화와 접목시키면 어떨까. 국경을 넘나들고, 현재와 과거를 아우르는 색다른 시도는 천지를 울릴 듯한 가슴 떨림을 우리에게 선사하지 않을까. 농악에 미쳐 오롯히 한길을 걸어온 그가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