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의 재조명은 내 인생의 전환점"
하고 싶은 말이 일단 해야 직성이 풀리고, 부화가 치밀면 쌍시옷이 붙은 욕도 스스럼없이 한다. 형식에 얽매이는 것은 죽기보다 싫어하고, 오직 ‘물감’만이 자신을 지배할 수 있다는 이 사람은 괴팍하고 철없는 그림쟁이임에 틀림없다. 그는 90년대 압구정동 ‘오렌지족’이었다. 적어도 명성황후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일제강점기 경찰, 군인을 배출했던 집안 내력을 들먹이며, 자신의 가문이 친일이면 친일이었지 독립운동가 집안은 아니었다고 거침없이 말하고, 목에 힘 주는 의원님(?)들을 보고 단지 그 자리에 서고 싶다는 이유로 지방선거에 출마해 떨어졌다 말한다. 궁금했다. 그가 얼마나 더 까발릴 수 있는지... ‘자유인 김철환’의 ‘약간 위험한 인터뷰’는 이런 호기심에서 시작됐다. 단지 한가지 매력적인 것은 그가 분노할 줄 안다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사실 명성황후를 그리게 된 것은 특별한 역사의식을 갖고 시작한 것 아니었다. 덕수궁에서 그림 그리고 있는 그에게 궁중문화연구회 관계자가 그림이 좋다며 명성황후를 그려보라는 제안을 받아 그리기 시작했고, 명성황후를 그리기 위해 기록들을 뒤졌다. 그리고 분노했다.
당시 역사화가들은 일본 낭인들이 칼로 명성황후를 내리치는 사실적인 장면을 묘사한 반면 그는 명성황후의 시해를 슬퍼하고 분노하는 마음을 그림에 담았다. 그는 그 때의 자신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작가정신보다는 애국심에 불타 있었다고 회상한다.
여주 능현리에 있는 명성황후의 생가 복원에도 참여했다. “허름한 초가집에 비석 하나, 걸인이 살면서 관리하더군요. 한 나라 국모의 생가가 그렇게 허술하게 관리된다는 게 안타까웠어요.” 문화관광부와 경기도를 오가며, 생가 복원을 요청했고, 당시 임창렬 도지사는 예산 5억원을 투입하기에 이르렀다.
그림 밖에 모르는 그림쟁이가 기존 정치판에 들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웃고 싶지 않아도 웃어야 했고, 나이가 많건 적건 한표 얻으려고 무조건 ‘형님’이라고 아부하고 다녔다. “아무 준비없이 정치를 하겠다고 뛰어들었죠. 제가 가진 것이라고는 예술적 전문성 밖에 없는데, 기존 정치판의 관행들을 답습하려 했으니 늘 깨져 나가고 어설펐지요.”
그는 요즘 가식적이었던 모습을 버리고, 원래대로 돌아오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예술가적 장점을 살려 지역사회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도록 봉사하고 싶다고도 했다.
요즘엔 조각에 관심이 많다. 평면적인 그림만 그렸지만 시각을 넘어서 촉각까지 도전해 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고흐, 고갱이 천재인 이유는 먼 미래에 다가설 예술의 장르를 먼저 개척했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또 그는 웃으며 말한다. 먼저 앞서 나가는 것은 너무 힘들고 배고프니 자신은 천재가 되고 싶지 않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