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의 재조명은 내 인생의 전환점"

하고 싶은 말이 일단 해야 직성이 풀리고, 부화가 치밀면 쌍시옷이 붙은 욕도 스스럼없이 한다. 형식에 얽매이는 것은 죽기보다 싫어하고, 오직 ‘물감’만이 자신을 지배할 수 있다는 이 사람은 괴팍하고 철없는 그림쟁이임에 틀림없다. 그는 90년대 압구정동 ‘오렌지족’이었다. 적어도 명성황후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일제강점기 경찰, 군인을 배출했던 집안 내력을 들먹이며, 자신의 가문이 친일이면 친일이었지 독립운동가 집안은 아니었다고 거침없이 말하고, 목에 힘 주는 의원님(?)들을 보고 단지 그 자리에 서고 싶다는 이유로 지방선거에 출마해 떨어졌다 말한다. 궁금했다. 그가 얼마나 더 까발릴 수 있는지... ‘자유인 김철환’의 ‘약간 위험한 인터뷰’는 이런 호기심에서 시작됐다. 단지 한가지 매력적인 것은 그가 분노할 줄 안다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래봬도 ‘김철환’은 ‘대한민국 최초의 서사화갗로 우리 미술계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1995년 그는 광복회, 3.1여성동지회, 궁중문화연구회, 예림회의 후원으로 명성황후 사후 100주년 기념 추모전시회를 열었다. 매스컴은 ‘김철환’이라는 화가를 주목했고, 그는 무명작가에서 벗어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사실 명성황후를 그리게 된 것은 특별한 역사의식을 갖고 시작한 것 아니었다. 덕수궁에서 그림 그리고 있는 그에게 궁중문화연구회 관계자가 그림이 좋다며 명성황후를 그려보라는 제안을 받아 그리기 시작했고, 명성황후를 그리기 위해 기록들을 뒤졌다. 그리고 분노했다.

                      ▲ 작품명 ‘나는 조선의       국모다’ 김철환 작
▲ 작품명 ‘나는 조선의 국모다’ 김철환 작
“명성황후를 그리다 보니 자연히 애국자가 되어 있더라고요. 명성황후의 본명은 ‘민경효’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명성황후를 기생이름을 따 ‘민자영’이라 불렀습니다. 양아치쯤 되는 일본 낭인패들로 하여금 시해케 한 것 역시 국모의 예우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지요.”

당시 역사화가들은 일본 낭인들이 칼로 명성황후를 내리치는 사실적인 장면을 묘사한 반면 그는 명성황후의 시해를 슬퍼하고 분노하는 마음을 그림에 담았다. 그는 그 때의 자신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작가정신보다는 애국심에 불타 있었다고 회상한다.

여주 능현리에 있는 명성황후의 생가 복원에도 참여했다. “허름한 초가집에 비석 하나, 걸인이 살면서 관리하더군요. 한 나라 국모의 생가가 그렇게 허술하게 관리된다는 게 안타까웠어요.” 문화관광부와 경기도를 오가며, 생가 복원을 요청했고, 당시 임창렬 도지사는 예산 5억원을 투입하기에 이르렀다.

                      ▲ 일본에서 ‘민비암살’이라는       책을 발간한 ‘각자방자 여사’가 보낸 사과의 편지. 이 사과문에는 일본 정치지도자들이 결탁해 일본 낭인패들을 동원해 조선의 국모를       암살한 사건은 흉악한 침략정신을 표출한 용서받지 못할 행동으로 일본인이 반성한다는 사죄의 뜻이 담겨 있다.
▲ 일본에서 ‘민비암살’이라는 책을 발간한 ‘각자방자 여사’가 보낸 사과의 편지. 이 사과문에는 일본 정치지도자들이 결탁해 일본 낭인패들을 동원해 조선의 국모를 암살한 사건은 흉악한 침략정신을 표출한 용서받지 못할 행동으로 일본인이 반성한다는 사죄의 뜻이 담겨 있다.
그는 철없이 정치에 입문했다. 2002년, 2006년 지방선거에서 그는 낙선했다. 처음 명성황후를 아무 생각없이 그렸듯이 정치인이 되기 위한 시도 역시 무슨 사명감을 갖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행사장에서 공식적으로 소개받고, 의원이라고 목에 힘주는 것을 보고 자신도 한번 그 자리에 서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그림 밖에 모르는 그림쟁이가 기존 정치판에 들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웃고 싶지 않아도 웃어야 했고, 나이가 많건 적건 한표 얻으려고 무조건 ‘형님’이라고 아부하고 다녔다. “아무 준비없이 정치를 하겠다고 뛰어들었죠. 제가 가진 것이라고는 예술적 전문성 밖에 없는데, 기존 정치판의 관행들을 답습하려 했으니 늘 깨져 나가고 어설펐지요.”

그는 요즘 가식적이었던 모습을 버리고, 원래대로 돌아오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예술가적 장점을 살려 지역사회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도록 봉사하고 싶다고도 했다.

요즘엔 조각에 관심이 많다. 평면적인 그림만 그렸지만 시각을 넘어서 촉각까지 도전해 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고흐, 고갱이 천재인 이유는 먼 미래에 다가설 예술의 장르를 먼저 개척했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또 그는 웃으며 말한다. 먼저 앞서 나가는 것은 너무 힘들고 배고프니 자신은 천재가 되고 싶지 않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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