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초대석] 황효진 광명중학교 총동창회장

                      ▲ 황효진 광명중학교       총동창회장
▲ 황효진 광명중학교 총동창회장
얼마 전 아프카니스탄에서 탈레반 인질로 잡혀 41일 간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던 교회 청년들이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물론 그들은 살아서 돌아오긴 했지만 무사히 돌아온 것만은 아니었다. 아까운 두 명의 생명이 주검이 됐고 국가적 에너지를 엄청나게 소모케 했다.

그 동안 교회내 문제로만 인식됐던 해외 선교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부각돼 그들의 뜻과는 정반대로 일반인들 사이에 해외선교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확대되었다. 어쨌든 그들이 살아서 돌아온 것은 크게 다행스런 일이다. 더욱이 그와 같이 무모한(?) 해외 단기 선교를 다온 경험이 있던 나로서는 정말 남의 일만 같지 않았다.

몇 년전 아프리카 케냐로 단기 선교를 가족과 함께 다녀 온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 일행은 용감하게도 현재도 국제적인 분쟁지역으로 남아 있는 수단 남부 근처의 난민촌에까지 들어가 선교를 감행했다. 수단, 우간다, 이디오피아, 콩고 등 아프리카 곳곳에서 분쟁으로 희생된 사람들이 UN 관리하에 난민촌을 이루고 있는 곳이었기에 그 안에서도 수시로 종족간, 이념간, 종교간 분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기 직전에도 폭동이 있어 UN 고등판무관이 거처하는 건물의 유리창마저 깨져 있었다. 물론 이슬람을 믿는 난민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 일행 20여명은 그런 곳을 아무렇지도 않은 양 낮에는 이곳 저곳 난민들의 집을 방문하고 밤에는 야외에서 대형천막을 설치하여 예수 일대기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 공기가 심상치 않았다. 단기선교팀을 이끈 아프리카 현지 선교사님도 이슬람을 믿는 난민들 사이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는 첩보를 접하고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튿날 일정을 가능한 한 간소하게 하고 그날 밤에는 사람들이 한 군데 모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예정됐던 영화 상영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삼일째 되는 날 우리는 그 난민촌을 서둘러 빠져 나와 케냐 나이로비 외곽에 있는 세계 3대 빈민촌의 한 곳인 키베라를 방문하는 일정으로 변경해야 했다.

그때 아무런 준비도 없이 당당하게 들어섰다가 선교 대상으로 생각했던 상대방이 공격적으로 변해 우리에게 위해를 가할지도 모른다는 단순한 첩보 하나만으로 그 뜨겁던 열정이 싸늘하게 식어 버리고 두려움마저 찾아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 당당하던 기세는 어디가고 그토록 순식간에 풀이 죽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부끄러운 경험이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와 유사한 경험은 학생운동 시절에 이미 했었다. 자유와 용기를 그토록 외치며 물불 안가리던 내가 1980년 겨울 40여일간 갇혀 있던 독방 취조실의 두 명의 수사관 앞에서는 왜 그렇게 작아지던지… 그러나 그 땐 역사는 나의 편이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었기에 꿋꿋하게 전진할 수 있었다)

관념적으로는 무엇이나 할 것만 같은 그리고 죽음마저도 넘어설 것 같은(실제로 아프카니스탄으로 떠나기 전에 유서를 미리 쓰고 간 청년들도 여러 명 있었다고 한다) 열정으로 떠났던 그 청년들도 탈레반의 살해 위협 앞에 순수한 열정보다는 죽음에의 공포가 크게 앞섰을 것을 생각하니 내가 직접 경험하고 있는 양 가슴이 아프고 떨려오기도 했다.

사실 그러한 경험은 나로 하여금 현실적인 힘 앞에 힘없이 무너지는 인간의 나약함을 절실하게 느끼게 했다. 그러나 나는 좌절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그로 인해 세상을 인식하고 사람을 관용하는 폭이 넓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수없이 자문했다.

‘하나 뿐인 진리에 대한 믿음이 나를 열정적으로 만들었지만 그토록 부끄럽게 식은 이유가 무엇인가? 나의 나약함 때문인가? 이념이든 종교이든 간에 하나의 진리만을 붙들다가 상처받은 사람들이 얼마이던가? 하나의 신념체계만을 강요하던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을 보지 않는가? 특히 하나의 생각만을 요구하는 북녘의 땅은 이미 희망을 잃은 지 오래지 않은가? 하나의 종교만 강요되던 중세를 우리는 암흑시대라 하지 않던가? 나와 다른 사람들의 다른 생각은 과연 틀린 것인가?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는 것이 내가 틀렸다는 반증인가? 나와 다른 종교와 함께 선의의 경쟁을 하며 더불어 갈 수는 없는가?’

이런 자문들이 내 가슴에 소중한 새로운 생각의 씨앗을 뿌렸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더불어 비젼 세우기!

하나의 방향을 향해 가는 데 반드시 하나의 생각만 있을 순 없다. 생각의 우열을 가릴 필요도 없다. 함께 바라보는 목표를 향해 서로의 생각을 조율하면 된다. 조율이 잘 안되면 조금 늦게 가도 좋다.

함께 가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 다른 생각을 포용하니 그 다른 사람도 이미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함께 가니 좀 더디 간들 어떠한가! 이러한 생각의 씨앗이 몇 년새 나도 모르게 자랐다.

그 사이에 내 가슴에 새로운 열정도 함께 자라났다. 남에게 내 생각을 주입하려는 닫힌 열정 대신 남의 생각을 인정하며 하나의 방향을 향해 가고자 하는 열린 열정, 따뜻한 열정이다. 탈레반의 인질로 잡혔던 교회 청년들, 좌절을 딛고 따뜻한 열정으로 다시 일어나길 기대해본다.

저작권자 © 광명지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